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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이명 이 미 산 몹시 아팠던 여섯 살슬픔이 초대한 매미 한 마리내 오른쪽 귓속에 눌러앉았지 누군가 내 국어책 숨겼을 때매미는 나 대신 골목을 헤매며돌려줘돌려줘 직장에 다닐 땐 피곤해 피곤해그래서 결혼이나 하고일기장에 이상한 남편을 일러바칠 때도매미는 나보다 더 슬피 울었지 매미가 떠나면 나는 행복해질까보약을 먹고 명상음악을 듣고그러나 점점 힘이 세진 매미는 원고 마감일고치고 또 고치다 문장의 뼈대마저 허물어졌을 때두 마리였다가 세 마리였다가 죽음의 칸타타 레퀴엠 나는 살려줘 살려줘매미는 나를 삼키고 떠나겠다는 듯이 그래서 그날까지우리는 서로를 묵묵히 견딘다 (《애지》, 2025년 봄호)

장미와 날개 배 수 연 내가 빛이 되었다 상상하면퍼지고 퍼져서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접착력이 약한 동전 파스도나를 보고도 지나친 102번 버스도모르는 이의 더운 입김도 하지만 오늘 아침 나와 다툰 너는 도무지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너는 돌을 가져왔어진주가 아니라 사파이어가 아니라 나는 종이를 가져왔어비단이 아니라 벨벳이 아니라 우린 결혼을 해연애가 아니라 이별이 아니라 너는 돌로 만든 장미를 들고나는 종이로 접은 날개를 달고 우리는 오늘 천사처럼 서 있어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남은단 하나의 나를 사랑하려고 얼마나 좋을까얼마나 기쁠까 기꺼이 사랑은 마지막에 남아눈물에 젖는장미와 날개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4년 겨울호)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박 성 우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티브이는 꺼져 있고 내 몸에는 이불이 덮여 있다 아내는 연수받으러 가고 없는데 누구지? 유정란을 휴지에 싸서 부화시키려다 깨뜨리고 말던 유치원생 딸애는 그새 중학생이 되었다,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 , 창비, 2024)

라스트 컷 김 지 윤 마지막 장면들만 모은 필름을 가지고 싶어 먼 길로 사라지는 뒷모습과 마주 보는 두 얼굴들과 닫히는 문들, 사랑이 이루어지고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구한 뒤에 긴 여름의 끝, 소년이 어린 시절과 작별한 후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고 아이가 자라서 집을 떠나고 누군가를 영영 잃어버린 후 그 다음 날의 새벽에 스미는 햇살 형편없이 참패한 넋 나간 얼굴들 빛나는 우승자의 광채 트로피와 쓰레기 위에 드리우는 어둠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 운동장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은 건 이런 것들 너무 빨라 읽지 못하는 엔딩 크레딧 페이드아웃 되는 텅 빈 얼굴들 마침표를 손끝으로 오래 만져 닳게 해야지 세상의 모든 저주..
시인의 편지 병원 다음 병원, 병원 다음다음 맥줏집−소란에게 김안녕 / 시인 #1올여름은 유난하였다. 유난히 무더워서 누구도 만나지 않을 핑계가 되어 주었고, 여행도 산책도 무리였다. 그래서였을까. 소란…, 너의 시집(『수옥』)과 에세이(『빌딩과 시』)에 유독 깊이 들어가 잠수하듯 나는 너의 글을 탐독했다. 때로는 너의 문장을 읽는 일 자체가 상처를 덧나게 헤집는 것 같아서 덮어 두고선 딴청을 부려 보고, 그러다 또 숨 돌릴 수 있을 때면 다시 너의 문장들에 파묻혔다. 그래 정확히 그건 ‘파묻히다’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너의 문장 속에 파묻히면 슬며서 너의 손을 잡고 있는 기분도 들다가, 너와 맑은 소주 부딪는 감흥에 젖다가, 네가 걷는 걸음에 보폭을 맞춰 걷게 되고, “(네가) 아..

춘니(春泥) 신 미 나 언 땅이 풀리던 날에언니는 몸을 풀었습니다 달리아 같은 핏덩이를 쏟고서다리 사이에 양푼을 끼고미역국을 퍼먹었습니다 배냇저고리에끼울 팔이 없습니다말려서 태울 탯줄이 없습니다 새벽 산을 헤매다머리카락에도꼬마리를 묻히고 돌아온 언니야 장롱 밑에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반짝, 실눈을 뜰 때 * 춘니 : 얼었던 땅이 봄에 녹아서 된 진창. (『백장미의 창백』, 문학동네, 2024)

다정한 옷장에 걸려 있는 한 여 진 뽀글이 양털 조끼를 꺼내 입고 신은 아스피린을 삼켰다 그리고 하얀 들판에 누워 생각했다 그의 의도가 아닌 것들과 살면서 잦은 몸살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해 누군가 그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다면 투명한 정맥을 지닌 식물 또는 깊은 손금을 지닌 동물이 되는 것 그래서 좀 더 지혜롭게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겠지만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이 얼어붙은 양파를 캐 먹으며 겨울을 날 때까지 신은 숨죽인 채 거기 그대로 있었고 사람들이 살아 들판을 다 건너자 양파즙이 뚝뚝 떨어지는 구멍난 가슴을 일으키며 신은 참았던 기침을 그제야 길게 뱉었다 그리고 옷장 속에 ..

유리잔 영혼 황 유 원 실수로 건드린 유리잔이 울린다순간 영혼이 생겨났다사라지는 느낌으로 유리잔에 영혼 같은 건 없겠지만영혼을 믿는 사람이 지나가다 들으면 잠시멈춰 서서성호를 그을 것만 같은 마음으로 잠시 공중이고요해진다 유리잔에 대고 후우- 분입김처럼고요가 공중에 퍼졌다사라져 공중은 원래 투명한 것이지만실수로 건드린 유리잔이 울리지 않으면 우린 그게투명한 줄도 모르고 오직 실수를 통해서만 영혼 같은 것은잠시나마 생겨날 수 있다는 듯우린 자꾸만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데 어느 날 실수로 창밖에 내놓은 유리잔에는흰 눈이 가득 쌓인 채천천히녹아가고 있었다 퍼붓던 눈이비로소 한잔의 물로고요해져 있었다 (『하얀 사슴 연못 』 , 창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