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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시인의 편지 : 병원 다음 병원, 병원 다음다음 맥줏집 - 소란에게 (시와 경계 2024년 겨울호) 본문
시인의 편지
병원 다음 병원, 병원 다음다음 맥줏집
−소란에게
김안녕 / 시인
#1
올여름은 유난하였다. 유난히 무더워서 누구도 만나지 않을 핑계가 되어 주었고, 여행도 산책도 무리였다. 그래서였을까. 소란…, 너의 시집(『수옥』)과 에세이(『빌딩과 시』)에 유독 깊이 들어가 잠수하듯 나는 너의 글을 탐독했다. 때로는 너의 문장을 읽는 일 자체가 상처를 덧나게 헤집는 것 같아서 덮어 두고선 딴청을 부려 보고, 그러다 또 숨 돌릴 수 있을 때면 다시 너의 문장들에 파묻혔다. 그래 정확히 그건 ‘파묻히다’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너의 문장 속에 파묻히면 슬며서 너의 손을 잡고 있는 기분도 들다가, 너와 맑은 소주 부딪는 감흥에 젖다가, 네가 걷는 걸음에 보폭을 맞춰 걷게 되고, “(네가) 아는 가장 먼 곳으로”(「기차를 타고」, 『수옥』) 함께 가는 상상도 하게 되었다. 언젠가 네가 떠났던 몽골 여행지를 멋대로 상상해 보고, 내가 가장 멀리 갔던 나라 인도에서의 날들도 슬며시 꺼내 보면서 지금 우리가 부유하는 ‘삶’이라는 이 황무지를 다시금 부여잡아 볼 의미를 덧대 보는 것이다.
작년과 올해 나는 소소하게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산부인과와 피부과와 외과 등등을 전전하다 보니 맥이 빠졌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질환이 낫고 나면 또 다른 질환이 뒤이어 생겨났다. 이제 죽는 날까지 병원 투어가 그치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새삼스레 엄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자기 삶에 별 투정 없이 아프고, 투정 없이 슬프고, 투정 없이 고독했던 삶들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불행, 하고 부르면 / 그는 그게 자기 이름인 줄도 모르고”(「불행한 일」, 『수옥』) 주어진 일상을 꼬박꼬박 살아가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응원했다. 거기 너도, 너의 아버지도 있겠지 하면서. 그러다 지난 8월에 불쑥, 네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공중에서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났다.
#2
이상한 꿈을 자주 꾸는 날들이다. 일상 속에서 균열을 내던 일들이 결국에 희한한 꿈으로 드러나고, 잠 깬 아침이면 백발 마귀 같은 심장으로 갈아 끼우고 출근 준비를 한다. (그래 아무리 오래 살아도 출근은 그런 것이다. 도무지 스스로 쇠뭉치가 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일.) 출근길에 시집 한 권. 그것이 약이겠거니 하면서 버스 타고 전철을 탄다. 병원에 가고 호수에 가고 배드민턴장에도 간다.
오늘 아침엔 첫 시집을 낸 시인이 쓴 한 구절에 오래 눈길이 갔다. “견딜 수 없는 일들은 /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 사흘쯤 앓고 나면 / 열이 내렸다”(임원묵, 「구조조정」). 지금 나는 그 ‘사흘’이 지나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숨죽인다. 사흘이 영영이 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도 함께 지닌 채.
우리 모두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겠지. 몇 해 동안 너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우리가 비슷한 부류의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지금 너는 또 얼마나 먹먹한 심정으로 하루를 이어 갈까, 시를 쓰다 말다 하며 견디고 있을까, 사람이 괴물이 되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혼자 흐느낄까. 그러다, 사람이 마침내 사람인 순간을 보며 위안을 얻을까. 내가 너의 시로 인하여 잠시 회복하였듯, 나도 나의 시로 너를 회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얹어 보기도 하면서.
#3
지난봄 신경림 선생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와 혜화역으로 향하던 골목에서 “선배, 한잔만 하고 갈까요?” 하고 네가 물어봐 주어서 따듯했던 그 저녁을 생각한다. (벚꽃이 벌써 다 졌을 무렵인데, 그날을 생각하면 어쩐지 벚꽃 흩날리는 장면이 겹쳐 떠오른다. 그건 네 이름이 소란이기 때문이고 소란 밴드의 〈벚꽃이 내린다〉라는 노래 때문이겠지?) 병원을 지나 장례식장을 지나 터널을 지나, 우리 환한 12월의 맥줏집에서 만나자. 나는 감기 안 걸린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안심이 될 테고, 생맥주 거품처럼 하얀 눈이 내리면 그땐 더없이 기쁠 것이다.
김안녕 _ 경북 고령 출생. 2000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사랑의 근력』 외.
(계간 시와경계,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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