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한여진 _ 다정한 옷장에 걸려 있는 본문

꽃처럼 아픈 詩

한여진 _ 다정한 옷장에 걸려 있는

수평선다방의 시 2024. 11. 26. 07:59

 

다정한 옷장에 걸려 있는

                                            한 여 진

뽀글이 양털 조끼를 꺼내 입고
신은 아스피린을 삼켰다

그리고 하얀 들판에 누워 생각했다

그의 의도가 아닌 것들과
살면서 잦은 몸살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해

누군가 그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다면

투명한 정맥을 지닌 식물 또는
깊은 손금을 지닌 동물이 되는 것

그래서 좀 더 지혜롭게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겠지만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이 얼어붙은 양파를 캐 먹으며 겨울을 날 때까지
신은 숨죽인 채 거기 그대로 있었고

사람들이 살아 들판을 다 건너자
양파즙이 뚝뚝 떨어지는 구멍난 가슴을 일으키며
신은 참았던 기침을 그제야 길게 뱉었다

그리고 옷장 속에 들어가
약기운에 취해 잠에 들었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 문학동네, 2023)

'꽃처럼 아픈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윤 _ 라스트 컷  (0) 2025.01.24
신미나 _ 춘니(春泥)  (2) 2024.12.20
황유원 _ 유리잔 영혼  (0) 2024.10.24
고영민 _ 유령  (4) 2024.10.14
황유원 _ 별들의 속삭임  (0)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