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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마음이 먼저일까 몸이 먼저일까는 중요하지 않아요

수평선다방의 시 2023. 2. 1. 17:13

마음이 먼저일까 몸이 먼저일까는 중요하지 않아요

-매일 쑥뜸을 뜨는 사람

 

김안녕(시인)

#1

몇 해 전 여름, 맥주를 사려고 들어선 한 편의점 앞에는 작은 플라스틱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화분에는 초록 잎사귀를 단 맨드라미 모종이 심겨 있었고, 맨드라미를 거저 가져가도 좋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이런 횡재라니.”

도심에서 이런 깜찍한 일이 벌어져서 놀라웠다.

그날 같이 있던 선배는 작업실 마당에 두려고 맨드라미 화분 두 개를 모셔 갔는데, 가을이 마저 오기도 전에 시들어 죽어 버렸다 했다. 그리고 문드러진 맨드라미 사진을 휴대폰으로 전송해 왔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선배는 비록 맨드라미는 못 살렸지만 손수 아톰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길고양이는 제법 튼튼하게 키워냈다. 밥을 주며 보살피고, 어느 날은 잃어버린 지 열흘 만에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 온 고양이를 보며 대견해하기도 하고. 둘은 그렇게 자연스레 식구가 되어 같이 나이 들어 가고 있다.)

가끔 그 맨드라미를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맨드라미 모종을 기꺼이 내어 주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그것을 거두어 가 살리려 애쓰는 한 사람의 마음, 그 꽃이 잘 자라기를 바라며 응원하는 제3자의 마음. 그리고 또, 낯선 땅에서 버티려 안간힘을 쓰는 꽃의 마음을….

작은 생명 하나 거두어 키우는 일도 쉽지 않네, 그런 생각은 살아갈수록 더 커져만 간다.

 

#2

하루 한 번 쑥뜸을 뜬다. 최첨단 시대에 뜸을 뜬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큰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나이가 많이 든 것도 아닌데 왜 뜸을 뜨지?’ 하는 표정이다. 그러면 나는 뜸의 효능을 술술 읊어 나가기 시작하고 결론은 이렇게 난다. “만성 비염 때문에 환절기마다 잠을 설치던 제가 건강해졌어요. 그리고 무릎 아프던 것도 감쪽같이 낫고요. 이게 다 뜸 덕분이라니까요!”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본능적으로 아픈 곳을 누르거나 문지르고 주물러서 자극을 주었다. 그러니 아픈 곳에 손이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인 셈이다. 뜸 관련 서적을 보면 인간이 불을 발견하면서 모든 문명의 변화가 시작된 것처럼 치료 방법도 불로 인해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고 한다.

뜸 구()’자는 불 화()와 오랠 구()가 조합된 글자로 아픈 부위를 불로 오랫동안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뜸 치료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나는 뜸쑥을 경혈(經穴)에 올려놓고 불을 붙여 태우는 방식의 뜸을 뜨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물론 이렇게 뜸을 뜨면 작은 점 같은 뜸 자국(화상)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주요 경혈 자리(곡지, 족삼리, 중완 등)에 거의 매일 뜸을 뜬다. 주사도 불도 두려워하는 내가 어떻게 뜸을 뜨게 되었을까,

 

#3

서른 살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항상 몸보다는 마음이 더 중하다고 믿는 편이었다.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 최선이라고 여겼고 별다른 운동이나 몸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는 아니구나. 몸무게를 줄이고 싶어서 했으니.) 헬스와 등산, 수영에 취미가 붙어 하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시 쓰기만큼이나 재미있어서 푹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요가를 했고 서른아홉 살에는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해 난생처음 배드민턴 레슨까지 받게 되었다. 배드민턴이 생각보다 어렵고 과격한데 묘한 중독성 때문에 그만둘 수도 없었다. 셔틀콕이 공중을 날아가 내가 목표한 지점에 꽂힐 때의 쾌감, 라켓에 셔틀콕이 정확하게 맞아 탕 탕하고 울릴 때의 그 타격감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그런데 배드민턴을 잘 치고 싶을수록 점점 무릎에 무리가 갔다. (무릎뿐이겠는가. 어깨와 허리, 팔에서 자꾸만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 왔다.) 아무래도 코트 내에서 과격하게 뛰어야 하는 운동이기도 했고, 점차 노화되는 관절이 못 받쳐 줄 만도 했다.

그러다 아는 이에게서 쑥뜸을 뜨면 무릎병도 좋아질 거라는 귀띔을 듣고는 근 석 달 동안 청량리에 있는 교육원으로 주말마다 나가 뜸의 원리와 기술을 배운 게 시작이었다. 처음 뜸을 뜬 날에는 벌침에 쏘인 것처럼 아파서 악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걸 두세 차례 경험하고 나니 몸이 가벼워지는 한편 온열감에 평온을 느끼게 되었다. 이론에 따르면 뜸이 좋은 피를 만들어 세포의 움직임을 활성화시켜서 그렇다는데, 일단은 숙면을 취하게 되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하게 되었다.

뜸을 뜰 때 쓰는 쑥은 대개 삼 년 이상 묵은 것인데 담황색을 띠고 촉감이 부드럽고 결이 고르며 잡물이 없이 제조된 것을 쓰며, 시중에서 몇천 원만 주면 구할 수 있다. 섬유질이 풍부한 쑥은 출혈을 그치게 하는 지혈(止血) 작용과 복통의 진정, 몸을 따뜻하게 하는 온신(溫身), 피를 맑게 해 주는 정혈(淨血)작용 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쑤시던 무릎도 슬안(膝眼, 슬목이라고도 하며 무릎인대의 양쪽과 대퇴골 및 경골의 내측과 외측관절융기로 이루어진 오목한 곳에 위치한다.) 경혈 자리에 뜸을 뜨고부터는 서서히 좋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완치는 아니어서 적절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병행했다.

뜸 배우는 사람들은 흔히 뜸 맛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시원하다고 표현하는 이치와 비슷하다. 뜸을 처음 뜰 때는 뜨겁지만 그것을 경험하면 할수록 시원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을 뜸 맛을 안다고 얘기한다.

그 뜸 맛을 혼자 알고 있기 힘들어 가족과 친구에게 전파했다. 동거인은 밤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편이라 신장 위에 위치해 있는 신유(腎兪, 2번 요추 좌우에 자리한 경혈), 평소 두통이 심하고 불면이 있는 안 모 시인에게는 백회(百會, 머리 꼭대기 중앙에 있는 경혈), 그리고 만성적으로 어깨가 아픈 유 모 시인에게는 견정(肩井, 어깨 쪽에 있는 경혈) 자리에 뜸을 떠 주었다. (두 시인의 경우는 단발성이어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동거인은 꾸준히 뜸을 한 까닭에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일곱 해 동안 뜸을 떠 왔는데, 이 행위는 이제 내개 백팔배를 드리는 일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혹은 초를 켜 놓고 기도를 드리는 일과 같다고 할까. 분명 몸으로 하는 일인데 마음(정신)과도 닿아 있는 일. 내 몸 하나라도 살펴보려고 시작한 일이 어느새 마음을 살피는 것으로까지, 그리고 타인의 세계를 살피는 일로까지 뻗어 가고 있다. 쑥이 타들어 갈 때의 냄새, 불과 맞닿는 찰나에 뜨거워졌다 서서히 식어 가는 살을 들여다볼 때의 느낌, 그리고 서서히 오장육부 속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기운….

함민복 시인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라는 시에서 담배 피는 한 노인을 바라보며 영혼에 뜸을 뜨고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온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아늑하게 하는지……. 뜸은 그런 시간을 선물한다.

 

(2022년 현대시 1월호 '시인들의 사생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