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최승호 _ 보석 본문

꽃처럼 아픈 詩

최승호 _ 보석

수평선다방의 시 2010. 4. 12. 23:53

 

  

        보석

 

                                   최 승 호

 

  눈사람은 늘 고요합니다. 입적(入寂)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아무런 사리도 나오지 않는답니다.

초 같은 몸에서 진신(眞身) 사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투명한 물방울들이 구슬인 양 굴러 나올

뿐이지요.

 

 

 

...

고요가 돌아오는 한밤중에 텅 비어 있는 백지를 나는 좋아한다. 손이 움직이고

펜이 일어서는 것도 그 시간대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희디힌 무(無) 위에

남겨야겠다는 강렬한 욕구, 내 안의 그 불길이 식지 않기 바란다. 엉뚱한 생각과

유머와 천진성이 나에게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란다. 백지와 펜이 있는 한 나는

늙어도 나의 시는 늙지 않으리라.

 

- 최승호 시선집 『얼음의 자서전』, 2005,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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