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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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파이, 『야간열차』

수평선다방의 시 2010. 2. 17. 11:41

 

 

 

야간열차 안에선 그렇듯 순간적이고 덧없는 일들이 미세하게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되곤 했다. 떠나온 역에 대한 기억은 반 이상 지워졌지만, 다가오는 역에 대해선 통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태. 벵골어로는 ‘어제’와 ‘내일’을 가리키는 말이 똑같다더니, 철로 위에선 현재가 과거나 미래와 똑같은 간격으로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12쪽)

 

과학자들이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에게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드는 예는 아마 폴 랑주뱅(Paul Langevin)의 ‘쌍둥이 형제 패러독스’일 것이다. 가령 쌍둥이 형제 중 한 사람만 열차로 여행을 떠나고 나머지 한 사람은 플랫폼에 남는다고 가정할 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가만히 있었던 사람보다 아주 조금이나마 덜 늙어 있다는 것이 쌍둥이 형제 패러독스의 내용이다. 떠나는 건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상대성이론은 이 케케묵은 속담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떠나는 건 자신을 살리는, 즉 조금 더 오래 살게 하는 것이라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시간관념이 다르다고 말하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히 열차 여행, 그것도 야간열차 여행을 즐기는 사람의 인생은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서 한층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철도는 요즘 세상에 몇 안 되는 특별한 순찰로, 시간의 틈새를 살펴볼 수 있는 순찰로니까. (38쪽)

 

경계라는 건 내게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인 동시에 나를 매혹하는 그 무엇이라는 걸. 그 경계가 넘기 힘든 것일수록 그 매력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은 더 강해진다. 나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경계가 처형되는 장면을 보러 갔다. 하지만 경계를 넘으려던 사람들이 총살당하던 바로 그 현장에 서 있으면서도(게다가 그들 중 몇몇의 시신은 채 식지도 않았는데) 나는 역사의 비극성 같은 건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건 내 마음속에서 뭔가 ‘시적인 것’으로 승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봉쇄된 거리며 창문이며 초토화된 ‘황무지’와 함께 탈출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탈출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그것을 넘으려고 기를 쓰는 한 삶은 어마어마하게 소중한 것이니까. (137쪽)

 

“시베리아 횡단은 한편으로는 지루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특이한 경험이다. 열차는 하루 종일 기적 소리도 요란하게 자작나무 숲과 언덕을 가로지른다. 어둠이 내린 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나중에는 한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무늬 벽지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똑같은 무늬가 계속 이어지는 벽지, 결코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벽지를.”(폴 서로우의 『철마를 타고(Riding The Iron Rooster)』의 일부분) 시오랑은 지루하다는 건 “시간을 씹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만큼 시간을 이가 얼얼하도록 씹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210쪽)

 

- 에릭 파이, 『야간열차』(푸른숲,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