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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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의 편지, '다섯 살의 영혼'

수평선다방의 시 2010. 6. 22. 20:23

다섯 살의 영혼

 

 

‘너를 만나고 돌아와 어둠 속에 맑아진 유리창을 본다.

어둠 속에서 맑아진 유리창…… 너의 얼굴이다’

기계가 기록해 놓은 형광빛 시각은 03/12 1:54 AM.

 

나는 그런 문자를 너에게 찍어 보냈다.

핸드폰 문자함에서 이원, 이원, 이원, 너의 이름을 보면서

문득, 연애하는 이들의 문자함이 이렇겠다,

후훗 그런 생각이 드네, 나의 친구.

 

나는 누군가에게 편지 쓰는 일에 매우 서툰 사람이었어.

너와 친구가 되고 나는 편지를 쓰게 되었지. 그렇지만

이런 지면은 역시 어색해. 내가 핸드폰 문자함을

뒤진 건 말하자면 컨닝하는 심정의 것일까. 나는 다만,

말줄임표로 대신했던 걸 조금, 아주 조금 이어서 쓰려고 해.

 

너는 어둠으로 영혼을 씻는다. 빛은 외부에서 어둠을 물리치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뼈가 그 안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것. 늪처럼 저수지처럼 어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유리창처럼 어둠을 닦고 어둠에 닦이는 것.

어렵게, 어렵게, 드디어 너는 가장 단순해진다.

천진한 어린이 이원으로 돌아간다. 너의 다섯 살은

빛 속에 있다. 슬픔과 노여움으로 다섯 살 어린이가

훼손되지 않도록, 어둠에 영혼의 눈이 덮이지 않도록

네가 더욱 고독해지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안다고

조그맣게 말해본다.

 

시는 다섯 살이 쓰는 것이다, 그렇게 너는 말하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 이 생에서 지켜야 할 것,

그것이 시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에겐 시가 다섯 살

영혼의 것이기 때문이겠지. 이번 생은 시를 쓰며 살기로 해,

그런 말을 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참 좋다.

 

너는 말했어.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길을 가야 한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이 독백인 줄만 알았어. 그래, 그것은

밤공기 속을 울리는 독백이기도 해. 그렇지만 나도 중얼거렸어.

그도, 만난 적 없는 그녀도 중얼거렸네. 서로 다른 골목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일 수 있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사랑해야겠지.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비워야겠지.

 

조금 더, 조금 더, 내가 너에게 배운 말이야. 이 말은

생을 사랑하는 자의 것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자의

것임이 분명하지. 조금 더, 애쓸게. 이 생에서.

 

03/31 00:08 AM. 나는 또 어둠이 깊숙이 닦아 놓은

푸른 유리창을 본다, 나의 친구.

 

- 시인 김행숙이 시인 이원에게 보낸 편지

 

(계간 『시안』, 2010년 여름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