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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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한창훈의 향연』

수평선다방의 시 2010. 1. 11. 15:23

 

 

 

 

그동안 만났던 이들이 낙타처럼, 가마우지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각자 다른 주민번호처럼 그들은 자신만의 율법과 국경과보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걸어다니는 공화국들이여
만나 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흔적이자 이력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섬은 푸른 바다 한가운데 익사 모면할 정도의 몇 뼘 땅.
광활한 수평의 세상을 버티고 있는 수직의 장소. 방파제를 넘어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초속 삼십 미터의 강풍. 어부의 죽음, 가지가 한쪽으로만 늘어나버린 팽나무.

단 한 뿌리라도 더 캐려다가 비탈에서 떨어져버린 아낙,
살아남은 자들의 깊은 주름. 급경사의 밭. 끝없이 이어지는 일.

이젠 됐다 툭, 떨어지는 동백꽃. 바다와 바람 외에는 모든 결핍의 장소.

이별과 쓸쓸함만큼은 풍족한 곳. 사람도 섬을 닮아버린다. 각자 독립된 고립이다.
- 33쪽

 

독도 문제만 보더라도 국토의 변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이 된다.
섬사람들은 외곽에서 대한민국의 국경을 긋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여섯시 뉴스를 보며 작업복 찾아 입고 배의 밧줄을 풀고 상자를 쌓고 미역을 포장하고
도미와 갈치를 낚는다. 돌아와 몸 누이면 가요무대를 보며 따라 부른다. 한국 사람이다.
발톱 끝 같은 주변부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발톱이 빠져보면 안다.
-184쪽

 

나는 세상길을 숫제 다 걸어버릴 작정을 했다. 여러 도시를 떠돌았다.
여전히 빈 곳이 채워지지 않았다. 더 걸었다. 세상의 것들이 나를 스쳐 뒤로 물러났다.
아무 곳이고 들어가 일 해주고 밥 얻어먹고 그리고 걸었다. 구도자가 걷는 이유가,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때 눈치 챘다.
충동과 도보와 침묵의 몇 년이 지나자 그녀는 비로소 나에게서 빠져 나갔다.

문득, 부쩍 성장한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자 알게 되었다.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웠던 게 여학생보다 처음으로 행복했던 그 시간대라는 것을.
-205쪽

 

                                     『한창훈의 향연』(중앙북스, 2009)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