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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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아픈 詩

김지녀 _ 드럼 연주법

수평선다방의 시 2010. 2. 12. 12:31

 

    드럼 연주법

 

                       김 지 녀

 

먹은 것을 다 게워 내고

비로소 내가 쓸쓸한 가죽으로 누워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릇처럼 흰 속살을 드러내지 않아도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떨림의 속도와 강도를

나의 가죽으로부터 느낄 수 있다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가죽으로부터

나는 속이 텅 빈 종이에 가깝다

그때 내 성대는 나로부터 가장 멀리에서 멈춰 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두드려도, 희망은 열리지 않는 철문

철문을 뚫고 유령처럼 나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을 때

다만 배가 고프다는 것

비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거의 동물에 가깝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소리는 얼룩져 있다

기린 표범 물개의 무늬처럼 어떤 패턴처럼

공백(空白)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아름다운 가죽이 되기 위해

나는 꼭 다문 입술로

언제라도 비를 맞으면서 걸어 다닐 수 있다

어떤 무늬로든 소리 낼 수 있다

 

(『시소의 감정』,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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