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허연 _ 청량리 황혼 본문

꽃처럼 아픈 詩

허연 _ 청량리 황혼

수평선다방의 시 2010. 1. 28. 14:22

 

 

  청량리 황혼

  -CANVAS에 유채

 

                        허  연

 

이따금씩 피를 팔러 가기도 했습니다

카스테라 한 봉지씩 사들고

지하 주차장에 모여 노래를 부를 때면

언제나 제일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지하도 입구에서 구두를 닦던

혼혈아 경태 녀석이었습니다

애써 보이려 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가난과

짝사랑은 속살을 비집고 나와

찬 바닥에 나뒹골곤 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던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누가 그었는지 우리들의 기억 속엔

붉은 줄이 하나 둘씩 지나가 있었고

시장 골목에서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어느새

그것들을 용서했습니다

시대극장 앞 길

유난히 눈길이 자주 마주치던

조그만 창녀애를 구해 내는 꿈을 꾸다 잠이 깨던

제기동 자취방

눈이 많았던 겨울이었습니다

나 혼자 용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중국집 구석방에서 녀석들은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희미한 알전구 속에서 흘러내리던 눈물

우리가 미친 듯 소리를 질러대던

무심한 하늘에선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겁이 많던 경태를

서울 구치소에서 면회하고 돌아오던 날

우리는 문신을 새겼던 가느다란 팔목을 확인하며

버리고 싶어도 땅끝까지 따라오던 날들과

그 거리를 떠났습니다

몇은 지원병이 되어

몇은 직업훈련원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어깨를 누르고 있던

어디에도 없는 내일로 떠나며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텔레비전처럼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꽃처럼 아픈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근화 _ 아파트  (0) 2010.02.17
김지녀 _ 드럼 연주법  (0) 2010.02.12
황병승 _ 그리고 계속되는 밤   (0) 2010.01.27
심보선 _ 삼십대  (0) 2010.01.26
김소연 _ 로컬 버스  (0) 2010.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