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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어떤 비닐봉지에게 강 은 교 어느 가을날 오후, 비닐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 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를 보여 주었다. 그 녀석이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얄궂은 바람, 나를 한 대 세게 쳤다. 나는 나가떨어졌다.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녀석, 비닐봉지는 바람에 춤추며 가는 중이었다. 나는 마구 달려갔다, 바람 속으로 비닐봉지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자꾸 달아났다.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실개천이 쭈빗쭈빗 흐..

우중산책 김 진 선 비에 젖은 새 아무도 보지 못했네 아무도 보지 못해서 말할 수 없었지 비 온 뒤의 골목은 마르지 않은 그림 같아서 속도를 전혀 느낄 수 없었네 참을 수 없겠지 새는 날아가야겠지 물웅덩이에 갇힌 한 마리의 새 작은 부리로 수면을 건드린다면 어지럽게 번지는 물결 위로 하늘의 일부가 잠시라도 흔들린다면 슬픔을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었네 다시 새는 날아가야겠지 위태롭겠지 상상이라면 어디선가 흠뻑 젖어 걸어가는 사람이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 이것은 물의 무게입니다 말하는 입술과 햇볕 아래 몸을 말리고 이제는 물이 사라진 무게입니다 증명해 보이는 몸 그게 나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한쪽만 젖은 날개는 어깨처럼 보이려나 버..

망각 곡선* 김 안 녕 1.공깃돌을 가지고 놀다싫증이 나꿀꺽 삼켜 버렸지그게 뭔지도 모르고 2.테이크아웃 커피잔의 무늬는 오래전 우리가 걸었던 내성천 강물을 닮았다뱀의 흐느적거리는 몸체도 닮았다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순간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상세포종이라는 병명만큼 아득한 타지에서더 이상 고통 없이 천국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해 달라는 너의 말이 귀울음처럼 들리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고도 맨 먼저 하는 것이 울음이었듯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맨 나중에 하게 되는 것이 기도라는 사실이끔찍해서나는 가장 뻔뻔한 배교자가 될 거야 무명 시인 나부랭이가 될 거야 술주정을 하지 절규하지 냉동고에 꽝꽝 얼려 두지 모든 거짓말 모든 고백을 3.얼어붙은 배춧잎 같은 얼굴..

주산(珠算)의 날들 김 안 녕 공깃돌을 세고콩알을 센다 핏방울을 세고알약을 세고불안을 세고흰 머리칼을 세고새를 세고눈물을 세고 빵을 센다 먹고 노동하며 셈해야 할 게 그런 것뿐이라면 타 버린 사랑이 남기고 간 잿더미는 도무지 셀 도리가 없다너와 나의 납골당은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물이 나올 때까지 샘을 파며밑장을 까며 술병을 센다남은 화투장을 센다 인생이 산 넘어 산 병원 다음 병원이라고 처음 일러 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렇지만 나는 사랑 다음 또 사랑을 하겠어,오금동 언덕길을 절하듯 오르며 마지막 별을 보는 사람 (《시와시학》 2025년 봄호)

무 하 상 욱 시골집 텃밭에 쭈그려 앉아 무를 뽑았다희고 투실투실한 무였다너희들 나눠 주고도 이걸 다 어떻게 하냐시장에 나가서라도 팔아 볼거나어머니는 뜻하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머릿속을 텅 비게 해 주는 무였다손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마음은 쉬었다 뽑아낸 자리마다 근심을 묻었다이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국을 끓이면 얼마나 시원하려나내 근심 묻은 자리마다 무가 다시 자라날 것을어머니도 알고 나도 알았다애초에 어머니도 무였고 나도 무였으니그러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달나라 청소』, 파란, 2025)

청춘 장 수 진 소년은 첨벙첨벙 물놀이를 한다매끄럽게 가라앉고 물 밖으로 솟아오른다웃는 얼굴이다우는 얼굴이다스포츠머리를 하고신경과에서 뇌파검사를 받기도 하고사랑사랑은 한 적이 없었다사랑은 병원보다 비쌌고흔들의자에 앉아 발장구를 친다질 좋은 재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내를자신을누군가 잘 그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밤이면 강가를 따라 달리며미용실 예약을 떠올렸고자신의 생이 그리 짧지 않다고 여기며강 너머로 내달렸다주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큰 개 한마리를 바라보며개도 없을 인생다짐을 했다 저 비둘기들을 사랑해야지 감정을 사용하지 않으며끝까지 남는 비둘기 한 마리를슬쩍 차 버려야지, 놀래켜야지연약한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세상에 보여 줘야지, 적어도 두세 명은 보겠지비슷한..

한창훈(1963~ ). 전남 여수 삼산면 거문도에서 난 소설가.선생님 어릴 적에 날이 좋으면 거문도에서 제주 섬이 보였는데,거기 바라볼 때면 "이야, 저기가 대한민국이구나" 하고 생각했다고.말씀을 참 구성지게 하시는 분. 나는 무릎을 가까이 대고 귀를 솔깃하고,행여 놓치는 말이 없는지 그분의 목소리를 집중해서 듣는다. 그 맛깔난 이야기 한 토막이 조만간 걷는사람에서 『바다어 마음사전』(가제)으로 발간될 예정인데,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편집자로서 또 독자로서 사뭇 궁금하다.연희문학창작촌에서, 서오릉 식당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간만에 낮술. 사람냄새 나는 겨울날. 포근.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문 신 해 뜨지 않는 날이 백 일간 지속된다면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비가 오면 심장까지 축축하게 젖도록 시를 읽을 것이다 도둑인 줄 알았다고 누군가 실없는 농을 걸어 오면 나는 벌써 시를 이만큼이나 훔쳤다고 쌓아 둔 시집을 보여 줄 것이다 또 누군가 나를 향해 한 마리 커다란 벌레 같다고 한다면 시에 맹목인 벌레가 될 것이다 야금야금 시를 읽다가 별빛도 달빛도 없이 내 안광으로만 시를 읽다가 마침내 눈빛이 시들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면 사흘이고 열흘이고 시를 새김질하다가 살구나무에 계절이 걸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