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김안녕 _ 망각 곡선 본문

꽃처럼 아픈 詩

김안녕 _ 망각 곡선

수평선다방의 시 2025. 4. 18. 17:44

망각 곡선*

 

                        김 안 녕

 

1.

공깃돌을 가지고 놀다

싫증이 나

꿀꺽 삼켜 버렸지

그게 뭔지도 모르고

 

2.

테이크아웃 커피잔의 무늬는 오래전 우리가 걸었던 내성천 강물을 닮았다

뱀의 흐느적거리는 몸체도 닮았다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순간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상세포종이라는 병명만큼 아득한 타지에서

더 이상 고통 없이 천국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해 달라는 너의 말이

귀울음처럼 들리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고도 맨 먼저 하는 것이 울음이었듯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맨 나중에 하게 되는 것이 기도라는 사실이

끔찍해서

나는 가장 뻔뻔한 배교자가 될 거야 무명 시인 나부랭이가 될 거야

술주정을 하지 절규하지

냉동고에 꽝꽝 얼려 두지 모든 거짓말 모든 고백을

 

3.

얼어붙은 배춧잎 같은 얼굴로

저기 아침이 오네

 

시를 쓰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술 마시고

 

예배당과 요양원을 번갈아 배회하는 슬픔에게

안녕 안녕, 인사하자

 

스무 겹의 이파리를 껴입고도

춥다 춥다 말하자

 

내가 나를 잊어도

귀신이든 신이든 한번은 들어 주겠지

 

석류 속 파 놓은 것처럼 빨간 해가 뜰 때, 그때 한번쯤

흠모했던 사람이여 내 이름을 불러 주련

 

 

* 시간이 지날수록 학습한 내용을 얼마나 잊는지에 대한 그래프.

 

(《시와시학 ,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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