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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창 원 조 성 래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속속들이 모든 먼 곳을 다 알고 모든 먼 곳을 파악하고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전지하신 하느님께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성모 마리아…… 파티마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

밥알을 넘기다 수저를 삼키면 정 현 우 우리는 수저 없이 밥을 떠먹습니다. 손이 없어도 나는 가장자리 잎을 흔들 수 있고 밥상에 달그락거리던 저녁을 훔칠 수 있고 모든 고백이 떠밀려오는 겨울밤 아무 일 없이 마주 앉아 식은 뭇국을 떠먹으면, 죽은 그대를 불러와 나란히 수저에 얼굴을 올리면 나는 목이 멥니다. 배고픈 나의 심장을 내밀어보면서 오른손으로 수저를 들어보면서 고개를 숙여 목구멍으로 허겁지겁 주검들을 넘기다가 아, 나는 뜨거워 왼쪽과 오른쪽 슬픔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가에 날리는 쌀알만 꼭꼭 씹어 뱉어내고 싶었습니다.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사랑의 뒷면 정 현 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 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 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새들은 식사 중 최 춘 희 이팝나무 풍성한 인심이 새들을 불러 모은다 올해도 어김없이 고봉밥 지어 놓고 한 상 아낌없이 내놓자 적막강산 심심한 풍경이 왁자해진다 봄 햇살에 졸다가 새소리에 잠 깬 고양이가 눈 크게 뜨고 지켜보다 먹잇감 낚아챌 기회를 노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들은 식사 중! 지금 아니면 맛보지 못할 겨우내 길어 올린 물로 갓 지어낸 새봄의 정갈한 한 끼,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람과 햇빛으로 차려낸 자연의 상차림 앞에 나도 옷깃 여미고 다가가 물 한 잔 내밀어 본다 밤새도록 심장을 쪼던 불면의 새들 배불리 먹고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짧은 봄날의 호사를 그대와 함께 누렸기에 이번 생은 아쉬움이 없다네
호두에게 안 희 연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 임주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겨울에 태어나 겨울에 죽었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입을 다물 수 있어서.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 말을 꺼내고 등으로 벽을 치며 입술을 문다. 겨울은 웃지 않는 사람들의 것. 그런 사람들이 자주 뒤돌아보는 곳. 겨울에는 주머니가 자주 터진다. 길을 잘못 든다. 잘 넘어진다. 보고 싶어 사라진다. 보이지 않게 돌아선다. 내가 나를 던지지 않고 아무도 나를 밀지 않아서 눈이 떨어진다. 어깨에 떨어진 사람들이 꿈을 꾼다. 꿈에서 성벽보다 높은 난간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 걷는사람, 2023)
아오리 임 주 아 우리는 아오리처럼 젊었다 얼마나 흰지 모르는 채 단단한 연두로 살았다 반으로 갈랐을 때 우리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 안에 나는 하얗게 질려 있었고 하나 안에 너는 까만 씨를 물고 있었다 우리는 모르는 척 서로를 나누어 가졌다 사이좋게 양손에 쥐고 언덕으로 달리고 달렸다 서로의 머리 위에 꼭지가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뒤통도 없이 아무 말 없이 돌아선 연두들이 머리를 짓찧으며 굴러오고 있었다 (임주아,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 2023, 걷는사람)
독거노인이 사는 집 이 명 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 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