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정호승 _ 부드러운 칼 본문

꽃처럼 아픈 詩

정호승 _ 부드러운 칼

수평선다방의 시 2009. 9. 29. 15:04

 

 

   부드러운 칼


                   정 호 승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창작과비평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