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이승희 _ 부치지 못한 편지 본문

꽃처럼 아픈 詩

이승희 _ 부치지 못한 편지

수평선다방의 시 2013. 7. 23. 11:46

 

 

  

    부치지 못한 편지

 

                          이 승 희

 

  여기는 지상에 없는 방 한 칸. 나는 여기서 봉인된 채 녹슬어가는 중입니다. 지리멸렬한 문장들이 구름처럼 떠돌다 목마름으로 내려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것.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덜어내는 일. 이 도시가, 사회가, 친구가, 애인이, 하실 박스 속에 담겨 몇 년째 풀지 못해 썩어가는 책들이 나를 들춰보고 조금씩 떼어먹기를, 그리하여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흔적 없이 날아가버릴 수 있으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 대로 잠들고, 집 나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은 살아서 내 죽음을 지켜보길. 그러니 하나도 새롭지 않은 절망이여 날마다 가지 치고 어서 꽃피워 융성해지시기를. 내가 지워진 자리, 내가 지워진 세상을 가만히 만져본다. 따뜻하구나, 거기 나 없이 융성한 저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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