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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림 _ 소음도 음악이 된다

수평선다방의 시 2012. 3. 27. 10:18

 

소음도 음악이 된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백사시옹(Vexationas)>이라는 한 장짜리 악보를 연주했다.

그런데 청중이 하나둘 자리를 뜨더니 끝날 무렵에는 십여 명만 남은 게 아닌가.

그럴 것이 <백사시옹>을 다 연주하는 데 열세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백사시옹>짜증이라는 뜻으로, 같은 멜로디가 840번이나 반복된다. 청중도, 연주자도 지치게 하는

이 곡은 프랑스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1866~1925)가 작곡했다. 사티는 클래식에 파격을 일삼는 작곡가로 유명했다.

고전 음악을 수십 년간 그대로 따라 하는 음악계에 염증을 느낀 그는 발레 음악 <퍼레이드> 연주에 권총, 호루라기, 타자기를 악기로

사용해 소음을 곁들였다. 청중은 장난하느냐며 야유를 퍼붓고 공연 도중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지만 사티는 소동에 굴하지 않았다.

고상한 고전 음악에 반기를 들듯 해학적인 연주 기호를 사용했다.

 

지시어를 느리게대신 구멍을 파듯 연주할 것’, ‘치통을 앓는 꾀꼬리처럼이라고 적은 것. 또 곡에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기분 나쁜 자의 왈츠> 등 익살스러운 제목을 붙이는가 하면 20초도 안 되는 짧은 멜로디가 5분이나 반복되는 곡도 썼다.

대중은 비슷한 멜로디가 계속돼 곡의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데다 웅장함도 없다며 그의 음악을 외면했다.

 

가난에 쪼들린 사티는 생계를 잇기 위해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곳에는 시인, 무용가, 작곡가 등 예술가들의 발길이 잦았는데,

그들은 사티의 연주를 듣고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고 신선한 선율에 빠져들었다. 늘 재능 없다는 말만 들어 온 사티에게 예술가들의 칭찬은

큰 격려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사티는 <짐노페디><그노시엔>이라는 명곡을 만들었다.

 

1920년에야 음악가로 인정받은 그는 유례없는 연주회를 열었다. 공연장이 아닌 미술관에서 <가구의 음악>을 발표한 것이다.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듣기보다 그림을 감상하든, 대화하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즐기라는 뜻에서였다.

여기서 가구처럼 배경으로 존재하는 음악, 즉 비지엠(BGM)이란 개념이 만들어졌다.

사티는 자신을 낡은 세상에 태어난 신세대라고 일컬었다. 시대를 앞선 음악을 한 탓에 무명 생활을 오래 했지만 소음, 호루라기를 연주에 이용한

시도는 전자 음악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티가 최초로 악기의 제한을 무너뜨린 덕분이었다.

 

- 이한림의 <소음도 음악이 된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