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다방의 빨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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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아픈 詩

허수경 _ 이국의 호텔

수평선다방의 시 2015. 2. 7. 12:15

 

 

        이국의 호텔

 

                                      허 수 경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었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 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의 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의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 안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에 든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울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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