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승 _ 생활이라는 생각
생활이라는 생각
이 현 승
1.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밤의 도시를 바라볼 때처럼 명확해질 때는 없다.
어두운 천지에 저마다 연등을 달아놓듯
빛나는 자리마다 욕정이, 질투가, 허기가 있다.
이것보다 명확한 것이 있는가.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
구할 수 없는 것만을 기도하듯
간절함의 세목 또한 매번 불가능의 물목이다.
오늘은 내가 웃고
내일은 네가 웃을 테지만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울다 잠든 아이가 웃으며 잠꼬대를 할 때,
배 속은 텅 빈 냉장고 불빛처럼 허기지고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휜다.
2. 생활이라는 생각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절망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먼저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3. 심문
늙는다는 것.
때리는 것도 힘에 부치지만
사실 맷집도 달린다.
권고사직을 제안받고 그는
소진된 복서처럼 무엇이든 그러안고 싶었다.
피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
세월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빼앗아버린다.
내버리다시피 판 주식을 사서 대박 난 사람처럼
불행은 감당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를 비집고
재앙은 불평등에 그 본성이 있다.
누군가 지금 그에게 가벼운 안부라도 묻는다면
바늘로 된 비를 맞듯 그는
땅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쓴 얼굴로.
4. 뜨거운 사람들2
반성도 지겹다.
형편없는 연기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커튼콜의 관객처럼
무의미한 반성이 반성 자체를 지운다.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
나는 돈벌레를 경멸하지만
순수나 양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가만히 현실을 다그치는 눈빛을 존경한다.
돈보다 정직한 것은 없다는 말은 졸부들의 금언이지만
다음 기회가 없다는 가정으로부터
결과보다 중요한 동기는 없다는 맹목이 만들어진다.
적대야말로 얼마나 완고한 스승인가.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사랑한 사람도 없지만
자기 자신보다 미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그토록 감정적이면서
정작 가장 선호하는 수사가 생략이라는 것은 얼마나 시사적인가.
가령 술김에 불을 질렀던 방화범이야말로
가장 뜨거운 반성에 근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천국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자
그는 용납할 수 없는 분기를 느꼈다.
불은 지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화가 더 나는 쪽도 언제나 약자이며
화를 낸 후에 더 많은 후회가 남는 쪽도 약자이다.
5. 롤러코스터
우리의 싸움에 승자가 없는 것은
우리가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벼랑을 나눠 쓰는 이혼 법정의 부부처럼
지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던 것이다.
매달린다는 말을 파생시킨 것은 추락일까 파경일까
내내 바닥까지 내려가면서, 마침내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을 지려디디며
우리는 이 추락의 처음을 생각할 것이다.
추락을 댓가로 얻어낸 시선으로 올려다볼 것이다.
허공을 향하여 다시 착착 올라가는 롤러코스터,
거기서 아직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
위험과 안도 사이에서 여전히 모험 중인 사람들,
떨어질 높이를 안은 채 두렵고 즐거운 사람들을.
그러므로 터진 자리는 기워진 자리였던 것
끝에 와서 보면 무연하게 보이는 처음의 자리.
미망으로만 붙들 수 있는 사물이 있다.
우리의 시작, 우리를 이어 붙인
처음 바늘이 가장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