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아픈 詩
민구 _ 루베시엔느의 사과도둑
수평선다방의 시
2015. 9. 17. 12:10
_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 '루베시엔느의 과수원'(1872년)
루베시엔느의 사과도둑
민 구
여름 별장이 있는 과수원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귀농을 하려고? 하고 웃지만
나는 모두 잠든 밤, 서랍에서 꺼낸 화지에
네모난 미닫이문을 그린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사라진다
문을 천천히 밀면 불어로 인쇄된 신문이 떨어지는데
팔베개를 한 개가 멍, 하고 짖어서
나도 흠흠, 헛기침을 하곤 한다
빵모자를 쓴 테오가 자줏빛 나무 사이로
녹슨 페달을 밟으며 유유히 사라지는
월요일을 더 좋아하지만
오늘 일요일, 시계는 울리지 않고
아침부터 도랑에 물이 흐르는 과수원 길에는
전지가위를 든 사람들로 분주하다
"살뤼(Salut)."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꼬망딸레부(Comment allez-vous)?" 나의 목소리는
떠도는 바람처럼 가늠할 수 없어
그들이 마주보며 무슨 소리 못 들었어? 하고 얘기할 때
어린 사과 하나를 안주머니에 넣는다
오동나무 평상이 있는 과수원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흙을 밟고 사시게? 깔깔깔 웃지만
나는 수저를 놓고 방으로 들어와
루베시엔느의 먹구름을 지우개로 문지른다
어제는 비가 내려서 서랍에 물이 고였다
때 아닌 소동으로 다홍색 물감이 흘러 내렸고
나는 장판에 굳은 껍질을 하루 종일 데어내느라
사과도둑처럼 손이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