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과 박하사탕
다락방과 박하사탕
김 은 경
경상북도의 작은 마을에서 정미소를 하던 부모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사남매를 돌봐줄 틈도 없이 바쁘셨는데, 어쩌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우리는 뭔가 든든한 ‘빽’이 생긴 것처럼 기쁨에 들떴다. 엄한 엄마와 다소 무뚝뚝한 아빠에 비해 외할머니는 산타클로스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외할머니는 특히 박하사탕을 좋아하셨다. 외할머니가 입안에 넣어주는 박하사탕 맛은 얼마나 알싸하고 달았는지. 헐렁한 바지춤에 넣어둔 용돈을 쥐어주시며 손녀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던 할머니의 손은 또 어찌나 따뜻했는지. 비녀를 꽂은 정갈한 모습의 할머니는 성품 또한 무척 인자하셨는데, 긴 병 끝에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한 번도 큰소리를 내거나 역정 내시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지금도 박하사탕을 보면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외할머니의 치마저고리, 외할머니의 쪽진 머리, 외할머니의 미소, 외할머니의 나긋한 음성, 그리고 주름진 두 손…. 그 모든 기억이 박하사탕 향기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너무 일찍 외할아버지를 여읜 탓에 할머니는 7남매를 홀몸으로 키워야 했다. 그만큼 녹록하지 않은 세월이었을 터. 가난한 집안 살림을 홀로 꾸려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아껴야 하셨을지, 어린 나이에도 나는 외할머니가 내미는 박하사탕에서 그 분의 쓸쓸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하사탕이 가진 묘한 맛을 아련하게 풀어낸 시가 있다.
“왜 박하사탕은 새 가슴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 너의 입 안에 환한 마름모꼴 한 개를 넣어주었다 / 얘야, 참, 아슬한 벼랑, 오오래 녹여 먹어라.”(신현정 시, ‘박하사탕’)
시인의 말처럼 할머니에게는 어쩜 박하사탕을 녹여 먹는 일이 삶이라는 아슬한 벼랑을 진득히 잘 견디는 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입안에 사탕을 굴리고 있다 보면 슬픔도 고통도 어느 순간 빨래처럼 말라갈 거라고 할머니는 믿고 계셨던 게 아닐까. 가끔은, 달콤한 민트향기 속에 자신의 설움을 묻고는 다른 세상의 꿈을 꾸기도 하셨던 게 아닐까.
이제는 엄마도 외할머니가 내게 박하사탕을 건네던 그 나이가 되었다. 꼬물꼬물한 손자들을 돌보느라 요즘 부쩍 더 흰머리가 늘어난 엄마. 엄마와 나 사이에도 과자에 담긴 추억이 있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운영하던 정미소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큰 방 두 칸과 마루, 그리고 너른 마당이 있었다. 특히 큰 방엔 다락방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엄마는 그곳을 자신만의 보물을 숨기는 곳으로 애용하고 있었다.
처녀 시절의 사진이며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장신구와 앙증맞은 소품들, 읍내에서 사온 간식거리도 죄다 다락방에 모셔져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호시탐탐 다락방을 노리고 있었다. 엄마가 과자를 내어 주는 일은 어쩌다 심부름을 잘해서 받는 칭찬의 의미였는데, 가뭄에 콩 나듯 감질날 수준이라 어린 내겐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과자를 먹지 못하는 심정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는 다락방에 올라 과자상자를 훔치는 일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다락방은 어른이나 올라갈 수 있는 높이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담력과 용기 없이는 초등학생의 몸으로는 힘에 부쳤다. 적당한 높이의 책상이나 의자가 있었다면 문제는 달랐겠지만 집안엔 도무지 활용할 만한 도구가 눈 씻고 봐도 안 보였다.
몇 번의 미끄러짐 끝에 겨우 다락방에 올랐다.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을의 100년 된 느티나무를 오르는 일처럼이나 경이의 순간이었고, 두 눈으로 직접 본 다락방은 상상 이상이었다.
보물섬이 따로 없었다. 엄마가 쌓아놓은 비스킷과 쿠키와 껌이며 사탕 따위를 보자 침이 꼴깍 넘어왔다. 동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숨겨야 한다. 들키지 않게 적당히 덜어내야 한다. 마치 외딴 섬에서 금화를 발견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기분이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죄를 짓는단 생각에 가슴이 쿵닥쿵닥 뛰었다.
미루나무가 춤추는 넓은 마당에서 맘껏 뛰어놀고, 산으로 들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유년 시절이 내겐 꽤 특별하고 행복했나 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시절의 꿈을 꾸고 나면 달콤한 추억에 빠져들곤 하는데, 가끔 다락방에 올라 과자를 먹는 행복한 꿈을 꾸기도 한다.
큰딸이 다락방에서 몰래 과자를 꺼내 먹는 걸 눈치 챘음에도 엄마는 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다락방 하나가 딸린 집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 다락방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한 작은 보물상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어쩐지 그 속엔 아카시아 향기 나는 껌 한 통, 그리고 외할머니의 박하사탕이 놓여 있을 것만 같다.
(새마을금고 사보, 2011년 11월호)